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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0   와다 하루키 회고록-내가 만난 한반도/⑨ 베트남전쟁 반대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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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 하루키 회고록-내가 만난 한반도/⑨ 베트남전쟁 반대운동
no categorized | 2007/02/10 18:23
» 1969년 중반 무렵 미군 아전병원이 있던 아사카 시내에서 베트남전쟁 반대시위를 벌이고 있는 오이즈미 시민들. 가운데 필자, 왼쪽은 시미즈 도모히사 교수. 이다 다카오가 찍었다.
와다 하루키 회고록-내가 만난 한반도/⑨ 베트남전쟁 반대운동

나는 결혼한 뒤 도쿄대 정문 앞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1965년 3월 시미즈 고등학교를 정년퇴직하고 도쿄 네리마구 오이즈미가쿠엔쵸에 집을 지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외동아들인 나와 함께 살 작정이었고 우리도 그러기를 바랬다.

그해 6월 우리는 아버지 집으로 이사했다. 이삿짐 트럭은 두 곳의 자위대 주둔지 앞을 지나면서 우리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 앞에 미군 골프장이 있었다. 아사카 미군기지의 일부였다. 거기는 사이타마현과 도쿄도 경계이고, 그곳을 넘어 오이즈미가쿠엔쵸로 갔다. 그해 연말 골프장 북쪽 미군기지에 베드수 1천개의 야전병원이 문을 열었다.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66년 봄 딸이 태어났다.

내가 그 야전병원을 알게 된 것은 66년 여름 <아사히 그라프>에서 사진을 봤기 때문이다. 나는 아사카로 달려가 헬리콥터에서 내려지는 부상병들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은 직장의 게시판에 붙었다. 나는 그 이상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 무렵 러시아사연구회는 러시아혁명 50주년 기념논문집을 낼 계획을 세웠다. 그 때문에 나는 논문 쓰는 일에 집중했다. 내가 맡은 부분은 2월혁명이었다. 세계대전 와중에 총력전체제에 불만을 품은 민중이 들고일어나 제정이 붕괴했다. 나는 이 혁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염전기분에 젖은 병사들의 반란에 주목했다.

67년에 들어가자 요코다 미 공군기지에서 베트남 부상병을 아사카 병원으로 실어나르는 헬리콥터가 우리 집 위를 날아다녔다. 나는 거의 1년간 그 소리를 들으며 50년 전의 병사들 반란에 대한 원고를 써내려갔던 것이다. 이미 오다 마코토씨와 쓰루미 슌스케씨 등은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베헤이렌)을 만들어 도쿄 도심에서 매달 정례적으로 데모를 벌이고 있었다.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 채 그토록 오랜 시간을 보낸다는 게 고통스러워졌다.

68년 4월5일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했다. 그것이 나를 충동질했다. 흑인청년들이 백인청년들보다 더 많이 징병당해 베트남 전장에서 더 많이 죽어갔다. 이래도 되는 건가. 나는 흑인 병사들에게 호소하고 싶었다. 다음 일요일 나는 종이에 슬로건(구호)을 적어 아사카 기지 앞에 1인시위를 벌였다. “Stop the War of Aggression(침략전쟁 중단하라)”, “Who Killed Your M.L.King?(누가 킹 목사를 죽였나)”, “Young Afro-American, Go Home. Your Battle is not Here(젊은 흑인병사들이여,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들이 싸울 전장은 여기가 아니다)” 그렇게 서 있자니 사이타마 베헤이렌의 아사카 기지 반대 첫 데모대가 그곳에 왔다. 나는 그들을 뒤따라 가면서 도쿄쪽 시민들도 들고 일어나야 할 때가 왔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처를 설득해서 처와 나 두 사람 이름으로, 베트남전쟁 반대행동을 시작하자고 호소하는 삐라를 작성해서 인쇄했다.

“오이즈미가쿠엔쵸 북쪽 하늘을 바쁘게 오가는 헬리콥터가 무엇을 운반하고 있는지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다.” “미국의 더러운 전쟁 기지가 이웃 마을에 있고, 베트남 전장에서 더러운 전쟁의 전사들을 후송하는 데 우리 마을 하늘을 이용하고 있는 걸 여러분은 좌시할 수 있는가. …오늘날 미국은 남베트남에 약 50만 대군을 보내 온갖 잔학한 무기를 사용하고 있으며, 제2차대전중 연합군기가 나치스 독일에 투하한 것보다 더 많은 폭탄을 베트남 전역에 뿌리고 있다.”

“우리 부부는 최근 1년간 견딜 수 없는 고통속에 헬리콥터 폭음을 들어왔다. 우리에겐 늙은 양친과 2살짜리 딸이 있다. 다행히 건강한 우리 딸이 할아버지나 할머니와 놀고 있는 머리 위로, 베트남 아이들의 팔을 망가뜨리고 딸들의 얼굴을 태우고 있는 더러운 전쟁의 전사들이 실려가는 것을 보고 있는 건 고통이다.”

내가 이 삐라를 오이즈미가쿠엔쵸 역 앞에서 뿌리기 시작한 것은 5월6일이었는데,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얘기를 걸어왔다. 회사에 근무하는 젊은 여성과 학생, 가까운 단지의 주부, 그리고 공산당 구의회 의원 등이었다. 곧 내 얘기가 공산당 신문 <아카하타(적기)>에 실렸다.

나는 네리마구 내에 사는 지인들에게 삐라를 보냈다. 가장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예전에 함께 역사학연구회 위원을 지낸 미국사 전문가 시미즈 도모히사 일본여자대 교수였다. 그는 내 요청을 받아주었으며, 이후 20년간 나의 시민운동에 가장 가까운 동지가 됐다. 또 나는 시민운동에는 기독교 목사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때마침 도쿄대 서양사연구실 대학원생한테서 베트남 어린이들에게 의약품 보내기 운동 삐라를 받았다. 이 운동 사무국은 오이즈미 교회라고 씌어져 있었다. 열광한 나는 서둘러 일본기독교단 오이즈미 교회를 찾아갔다. 요코다 이사오 목사도 부인인 사치코씨도 나와 함께 운동하기로 굳게 약속해 주었다. 이로써 운동의 모양새가 갖춰졌다.

이윽고 1968년 7월7일 ‘베트남전쟁에 반대하고 아사카기지 철수를 요구하는 오이즈미시민 모임’이 오이즈미 교회에서 열렸다. 참가자는 48명. 오이즈미 주민 외에 시미즈씨가 다니는 여자대, 내가 강의하던 릿쿄대 학생들도 왔다. 공산당 사람들도 있었고 아나키스트 문필가도 있었다. 이후 1개월간 2회의 기지 견학을 하고, 8·15기념 삐라도 발행했으며 제2차 집회도 열었다. 우리는 미국 병사들에게 뿌릴 영문 삐라도 만들었다. 시미즈씨의 작품이었다. 그것을 9월1일 제3회 기지견학 때 병사들에게 울타리 너머로 전달했다. 흑인병사가 받으러 왔기에 나는 흑인 노래 ‘Oh, Freedom(오, 자유)’를 불렀고 시미즈씨한테서 칭찬을 들었다.

68년 후반은 아사카 야전병원을 철거하라는 서명운동을 벌여 매달 한번씩 데모를 했다. 그때는 도쿄대가 학생반란으로 진통을 겪고 있었고 내 에너지도 대부분 그쪽으로 향해 있었다. 제국주의대학 해체를 부르짖은 학생들은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고 옥쇄하는 길을 택했고, 대학 당국은 기동대를 동원해 학생들을 분쇄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졌다.

그런 시련을 거쳐 69년 6월 우리는 하나의 비약기회를 맞았다. 그것은 아사카 반전방송국 의 개설이었다. 실은 병동 앞 담장 철조망에 확성기를 걸어놓고 매주 일요일 정해진 시각에 반전운동 뉴스와 반전가, 군대이탈 희망자를 위한 카운셀링 안내를 한 것이었다. 이 카운셀링은 미국에서 온 활동가가 베헤이렌 내에 개설한 것이었다. 방송 틈틈이 반전삐라, 신문 등을 던져넣었다. 미군병사들이 우리에게 돌을 던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기지 당국은 우리를 해산시키도록 일본정부에 요청하진 않았다. 기지 내부자료에 따르면 당국은 우리를 위험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내의 병사들 반전운동에 대해 자세히 조사했고, 우리 활동은 병사들의 마음을 인간의 마음으로 되돌림으로써 전쟁기계를 멈추게 하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마침내 아사카 기지에 근무하는 병사들 중에 반전신문을 발행하고 싶다는 2인조가 접촉해와 라는 신문을 두 차례 발행했다. 두 사람중 한 사람은 흑인병으로, 신문에는 Che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그것이 쿠바혁명의 영웅 게바라 이름이라는 것은 금방 알았다. 그들의 등장은 미국이 그 정의롭지 못한 전쟁에서 반드시 질 것이라는 확신을 안겨주었다.

우리는 반전방송을 전국으로 퍼뜨리려 노력했다. 시미즈씨와 내가 <미국군대는 해체되고 있다>는 책도 썼다. 결국 닉슨의 정책 전환으로 아사카 야전병원은 70년 말에 폐쇄됐다. 그 뒤 우리는 전시하의 남베트남에 진출하는 일본기업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런 기업을 ‘하이에나 기업’이라고 명명했다.

68, 69년 시점에서는 정직한 인간, 성실한 학생이라면 한번쯤은 베트남전쟁 반대데모에 참가할 것이라는 분위기였다. 일본이 미국의 전쟁을 돕는다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라는 기분이 존재했다. 이때 한국은 미국편에 가담해 참전하는 죄과를 강요당했으나 한국의 처지에 대해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 와다 하루키/도쿄대 명예교수
한국군 탈영병 김동희의 경우는 상징적이었다. 64년 베트남에 가기를 거부하고 일본으로 밀항해온 그는 1년 반 투옥당한 뒤 오무라 수용소에서 강제송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단계에서 베헤이렌이 사실을 파악하고 그의 일본망명을 인정하든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의 귀국’을 보장해주든지 하라고 정부에 요청했다. 68년에 그가 북한을 향해 출국하는 것으로 우리의 관심은 종지부를 찍었다. 그가 출국한 한국의 상황도, 그가 향한 북한의 상황도 우리의 관심밖이었던 것이다. 다만, 나는 그 다음해 “조선인을 바라보는 일본인의 얼굴이 그들의 진짜 얼굴이었다”는 김동희 말을 실은 <원점-차별을 주시한다>는 팸플릿을 냈다. 전후 일본의 반성은 식민지지배에 대한 반성이 결여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와다 하루키/도쿄대 명예교수, 번역/한승동 선임기자 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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